후삼국 시대의 문을 열고 닫은 영웅: 견훤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후백제 창업, 그리고 비극적인 몰락

견훤의 묘

견훤(甄萱, 867?~936)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후백제(後百濟, 892~935)를 건국한 걸출한 군웅입니다. 그는 신라의 쇠퇴 속에서 무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서남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옛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어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견훤은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의 왕건과 숙명적인 대결을 펼치며 한때는 후삼국 최강의 군주로 군림했으나, 만년에 아들 신검(神劍)의 반란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왕건에게 의탁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의 멸망에 앞장서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남겼습니다. 견훤의 삶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인화(人和)와 왕위 계승 문제라는 내부적 실패로 인해 무너진 비극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됩니다. 이 글은 견훤의 출생 배경, 후백제 건국 과정, 고려와의 치열한 쟁패, 그리고 부자간의 비극적인 갈등과 최후에 이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심도 있게 조명합니다.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다: 견훤의 출생과 신라 무인으로서의 생활

견훤은 867년(경문왕 7년)경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현재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으나 후에 상주 지역의 호족(豪族)으로 성장하여 장군이 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는 견훤이 단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신라 말기 지방 분권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세력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가 본래 이씨(李氏)였다가 후에 견씨(甄氏)로 성을 바꾸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그의 출신 성분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어릴 때부터 견훤은 용모가 웅장하고 기개가 비범했으며, 특히 무예에 뛰어났습니다. 그는 군인이 되어 신라의 서남해안 방면의 수자리(戍子)를 맡게 되었는데, 그의 용맹함은 이미 군 내부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잠을 잘 정도로 철저하게 적을 대비했으며,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비장(裨將)의 직책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활동했던 9세기 말은 통일신라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진성여왕(眞聖女王) 대에 이르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약화되고, 전국적으로 초적(草賊)이라 불리는 농민 반란군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호족들이 난립했습니다. 세금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중앙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국은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였습니다. 견훤은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신라 왕실의 무능을 목격하며, 자신이 직접 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구하고 옛 백제의 한을 풀겠다는 대의를 품게 됩니다. 이 애민과 복수라는 이중적인 명분은 그의 거병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견훤은 889년을 전후하여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규합했고, 892년(진성여왕 6년)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며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의 관직명을 사용하며 점진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00년,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궁예의 후고구려와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의 막을 올리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후백제 건국과 고려와의 치열한 쟁패: 공산 전투의 승리와 최대 영광

900년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후백제라는 국호를 내걸고 옛 백제의 부흥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백제의 건국 이념을 민족 자존과 자주적인 통합에 두었습니다.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은 것은 백제 무왕의 왕도였던 익산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으며, 그는 미륵불 신앙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고자 했습니다. 건국 초기에 후백제는 군사력과 경제력 면에서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에게는 초기에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903년에 왕건에게 나주 지역을 빼앗긴 것입니다. 나주는 후백제의 서남쪽에 위치한 해상 교통의 요지로, 이곳을 고려에게 내어줌으로써 후백제는 후방에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는 약점을 안게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고려가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고 후백제를 압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후, 견훤과 왕건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초기에는 사신을 교환하며 화친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두 영웅의 천하를 향한 야심은 결국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게 했습니다. 927년, 견훤은 그의 군사적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는 기습적으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을 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김부(훗날 경순왕)를 옹립하는 등 신라 왕실을 사실상 인질로 삼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군사를 이끌고 공산(公山, 지금의 팔공산) 일대로 진격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는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견훤은 왕건의 구원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고려의 장수 8명을 포함한 수많은 병력을 몰살시켰고, 왕건마저도 신숭겸(申崇謙) 등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견훤은 경상도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후삼국 최강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후에도 견훤은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 등지에서 고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929년까지 후백제의 최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몰락의 서막: 고창과 운주에서의 패배, 그리고 비극적인 왕위 계승 갈등

공산 전투 이후, 후백제는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했으나, 전쟁의 흐름은 점차 왕건의 고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930년에 벌어진 고창 전투(古昌 戰鬪, 지금의 안동)에서 견훤은 고려군에게 대패하며 8천여 명의 병사를 잃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는 호족들을 통합하고 민심을 얻는 데 주력했던 왕건의 전략과, 후백제가 나주를 잃은 지리적 약점의 결과였습니다. 또한 934년에는 운주(지금의 홍성)에서 다시 한번 고려군에게 대패하면서 후백제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패배 이후 견훤은 건강이 악화되어 직접 전투에 나설 수 없게 되었고, 이는 후백제의 군사적 사기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견훤은 내부적인 실패를 겪게 되는데, 바로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가장 총애했습니다. 금강은 몸집이 크고 지혜와 책략이 뛰어나 아버지인 견훤과 가장 닮았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견훤은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여러 차례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훤의 결정은 장남인 신검(神劍)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격렬한 불만을 샀습니다. 신검은 본래 견훤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은 935년 음력 3월에 결국 비극적인 반란으로 폭발했습니다. 신검은 동생들인 양검(良劍), 용검(龍劍)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지금의 김제)에 유폐시켰습니다. 스스로 세운 나라에서 아들에 의해 감금당한 견훤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권력의 비정함은 부자간의 천륜마저 갈라놓는 잔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려로의 망명과 비극적인 최후: 스스로 닫은 후삼국 시대의 문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불과 세 달 후인 935년 6월, 사위인 박영규(朴英規) 등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평생의 숙적이자 라이벌이었던 왕건의 고려였습니다. 견훤은 고려에 귀부하면서 왕건에게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라며 후백제를 칠 것을 간청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나라의 멸망을 자신의 손으로 앞장서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극적인 아이러니였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대우하며 '상부'(尙父)라는 존칭까지 부여하고, 공주를 시집보내주는 등 지극한 예우를 했습니다. 936년, 왕건은 견훤의 간청을 받아들여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고, 견훤은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이 원정군의 선봉에 섰습니다. 후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대결인 일리천 전투(一利川 戰鬪, 지금의 경북 구미)에서 견훤은 후백제군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고, 결국 후백제는 신검의 항복과 함께 멸망했습니다. 이로써 후삼국 시대는 견훤에 의해 시작되어 견훤이 직접 관여하여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멸망 이후, 견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건은 신검을 죽이지 않고 용서했는데, 이는 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견훤에게는 극도의 실망과 울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파멸과 아들의 배신, 그리고 마지막 복수의 기회마저 무산된 것에 대한 번민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황산(연산)에 있는 불사(佛舍)에서 등창(악성 종기)이 악화되어 936년 9월에 쓸쓸히 사망했습니다. 견훤은 출중한 군사적 지략과 통치 능력을 갖춘 명장이었으나, 내부적인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세운 나라를 무너뜨린 비운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왕건이라는 강력한 라이벌과의 대결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 붕괴로 인해 무너진 한 영웅의 파란만장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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